공공미술이 농촌을 살리는 방법
유럽의 도시들이 개발의 과정을 마치고 쇠퇴기에 접어들자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이라는 주제로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재생(再生)이라는 말은 뜻 그대로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다는 뜻이다. 영어로도 생명, 세대를 뜻하는 Generation에 Re가 붙어 있는 형상인데, 기존 개발 방식과 다른 중요한 점은 물리적인 개발과는 다른 무형적이고 내용적인 측면의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 미술관은 재생의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되었다. 신축이 아닌 예전 화력발전소를 그대로 활용하되 내부 프로그램과 기능만 변화시키는 재생디자인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함과 동시에 99m의 거대한 굴뚝 등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전력을 생산하는 화력발전소에서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발전소로서 미술관은 슬럼화되어 있던 그 지역도 개선시켰다. 소위 ‘테이트 효과’라고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모방 프로젝트를 만들어 냈고, 재생을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본 에치고 츠마리의 대지예술제는 쇠퇴해 가는 농촌을 예술과 디자인으로 ‘재생’, 활성화시킨 좋은 사례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적용되고 있는 ‘예술’을 통한 재생, ‘농촌’ 재생의 방법론으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위 ‘에치고 츠마리 효과’를 통해 우리 농촌 공간에 대한 여러 재생 방법론을 만드는 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한다.
예술과 디자인이 지역 농촌을 살리는 방법
비단 공간환경 또는 공공디자인뿐 아니라 ‘디자인’이라는 보편적 개념에서도, 산업화가 도래했던 시대의 디자인은 그 역할이 충분히 명확했던 것 같다. 기능적, 합리적, 효율적 생산과정에서의 디자인은 데코레이션과 시감적 매력을 지니게 하여 상업적 가치를 올리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였고, 비록 폭은 좁았지만 확실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토마스 쿤의 ‘Paradigm’ 개념이 그렇듯이 영원한 정설은 없으며, 시대의 가치가 변해 가며 정답도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기능, 합리, 효율이라는 모더니즘적 가치의 사회는 사람, 과정, 가치 등을 위시한 새로운 패러다임 중심의 탈구조적 개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는 타타르키비츠가 ‘근대미학’을 통해 밝힌 내적 디세뇨(Interno Disegno)와 외적 디세뇨(Esterno Disegno)의 가치가 교차되는 위대한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즉, 근대화의 시대가 완성된 결과로서의 작품과 그 결과를 중시하다 보니 시감적 측면을 고려하고 보편적 미와 합리적 측면을 강조하였던 외적 디세뇨(Esterno Disegno) 중심의 시대였다면, 예술작품을 위한 개념 중심의 내적 디세뇨(Interno Disegno)는 주관적이고 창의적인 가치를 중요시하고 과학이나 합리적 측면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개념이 이 시대의 창의적인 디자인적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마쓰다이역에 설치된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 안내사인
요컨대 우리는 효율적, 합리적, 표준화라는 근대화의 마술과 같은 개념에 푹 빠져 살아왔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반발이나 시도를 하지 않았다. 감히 말하건대, ‘에치고 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 대지예술제’는 그러한 개념들에 반기를 드는 혁신적 공간 전시 예술의 개념을 담고 있고, 그러한 철학이 알게 모르게 기저에 깔려 실행에 옮겨진 사례라 볼 수 있다. 왜 혁신적이라는 단어를 쓰는지는 그 불편함(?)에서 시작된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는 한마디로 참으로 ‘불편한’ 예술제이다. 다른 여타의 행사에 비해 관람객에 대한 공간적 배려는 참 찾기 힘들다. 그 뜨거운 농촌의 태양 아래 인공적 그늘 공간, 음료 공간, 그리고 친절한 안내사인 또한 발견하기 어렵다.

여느 전시장의 화려한 수식과 장식들은 에치고 츠마리에서는 살펴볼 수 없다. 노란색 안내 표식만이 이곳이 에치고 츠마리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전시장과 자연의 경계가 없는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의 배너사인만이 이곳 근처가 전시장임을 알려 준다.
작품들도 760평방미터에 걸쳐 380여 개의 작품이 흩어져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에 이 예술제의 매력이 있다. 그 작품 하나하나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좋든 싫든 에치고 츠마리의 자연 경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 지역의 농부, 주민들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획일적인 정보를 볼 수 있는 자세한 안내판 하나 없기 때문에 작품들을 몸으로, 체험으로, 주관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시원한 휴게 공간 또한 없기 때문에 그 공간, 그 시간에 우리는 고스란히 작품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앞서 얘기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전시 방식이 아닌 바로 비효율과 비합리적 배치들이 이러한 체험의 우연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인가? 또 농촌이라는 공간의 특징에 맞는 방식인가? 380개 예술작품을 보러 온 것인가? 그 설치된 작품 사이의 자연 경관을 즐기러 온 것인가? 참 불편했지만 잊지 못할 추억의 예술제가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이다.
“인간은 과학과 질서에 내포되어 있다”가 아닌 “인간은 자연에 내포되어 있다”는 기본 이념을 지닌 대지예술제는 예술과 디자인이 농촌 공간을 살리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공간 환경 가치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비효율적인 ‘대지예술제’의 또 다른 숨겨진 매력을 찾아보려 한다.
‘작품’과 ‘전시관’의 경계 붕괴
갤러리나 미술관은 미술작품의 최적 구현 효과를 위해 다양한 환경 상태를 고려하여 연출된다. 이를 위해 동선의 구조와 조도의 조절, 공간의 색채와 심지어 습도 및 온도, 청각적 효과까지 조절해 가며 그 ‘미술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환경을 구성하게 된다. 명확한 주종의 분리와 위계의 설정, 그에 따른 경계의 구분은 근대적 디자인 구성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일상인지가 명확하였고, 그에 따른 분리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가치 또한 그 작품을 경험하고 인지하는 타자에 의해 부여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타자 또한 예술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그 공간을 둘러싼 환경 또한 작품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Figure and Ground는 ‘Figuround’라는 신개념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책과 나무열매의 미술관(Seizo Tashima). Seizo Tashima의 작품은 자연 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작품과 일상공간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이 작품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에치고 츠마리에는 약 200개의 집락이 존재하며, 전통적으로 집락 단위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농촌 생태계를 이루어 왔다. 예술제에서는 이를 존중하여 농촌 생태계에 근거해 지역을 존중하고 농촌의 고유성을 지키려 하였다. 아티스트들은 바로 그 배경과 이야기를 배제하지 않고 예술을 실행하였고, 이는 유무형적인 Figure and Ground의 경계 해체를 가져왔다. 전시공간과 일상공간의 무경계는 상호 융합을 통해 소위 독특한 문화추이대를 형성하며 예술이 일상으로 파고드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허수아비 프로젝트(Oscar Oiwa). 빨간색 허수아비 등신대 가족 조형물은 논이라는 자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배경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예술제에는 농촌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작품 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술제의 작품들을 잘 보여 주기 위해 배경을 통제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에치고 츠마리에서는 이러한 통제와 경계의 해체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Background가 되는 에치고 츠마리의 자연을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기게 될 것이다.
‘사토야마’라는 일본 전통 경관의 개념에 맞게 환경, 경관, 생태적 구성과 흐름의 맥락에 정합성을 이루는 작품을 만들고, 농촌, 주민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이 예술제가 계획된 것을 보면, 농촌이라는 입지 장소의 특성, 예술 디자인 작품의 주제, 그리고 그곳에 있는 농민, 이 모든 구성요소를 잘 조합해 낸 공간 환경 디자인이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과 농촌, 또 주민과의 새로운 관계성 정립을 통해 더 명확한 경계선을 긋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어우러지고 융합되어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공간 디자인적 해체와 결합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의 작품 중 배경(Background) 없이 완성된 작품이 있는가?”

많은 잃어버린 창을 위하여(Akiko Utsumi). 작품 For Lots of Lost Windows는 언덕 위 공간에 커다란 창(窓)을 세워 놓고 커튼을 설치해 놓았으며, 10여 m 앞에는 창을 통해 차경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계단이 있다. 자연이 있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는 작품으로, 커튼을 펄럭이게 하는 바람과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산들, 일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묻혀 버리게 하지 않는다.
일상 농촌이 예술과 디자인을 만났을 때
국내외의 유수한 비엔날레들은 정해진 최적의 기간에 효율적으로 볼 수 있도록 카테고리도 구분하고 전시 밀도도 높여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작품을 보여 주려 한다. 전시 중간의 동선과 흐름, 밀도 등은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계획된다. 과정의 가치보다는 결과의 가치가, 경험보다는 정보의 가치가, 감성보다는 이성의 가치가, 분산보다는 집단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더니즘적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는 도쿄 23구에 해당하는 넓은 면적에 작품을 파편적으로, 규칙 없이 설치해 놓음으로써 방문객에게 커다란 미션 수행의 의무를 넘긴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에게 한 번에 다 보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불편하지만 즐거운 여행과 과정을 겪어야 하는 농촌 경관 체험, 이것이 이 대지예술제의 철학에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관조하는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이 아닌, 자연 안에서 인간이 다양한 감성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촉매 매개체로서 예술작품이 작동하기를...
다 보지 못해도 그 누구도 섭섭해하거나 짜증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예술작품을 보러 다니는 동안 주변의 농부를 만나고 농촌의 냄새와 주변의 나무, 산세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들은 예술작품의 경험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그 경험 과정에 예술과 농촌이 자연스레 융화되어 예술제의 가치를 새롭게 만든다. 이렇게 경험 과정에서 자연과 일치될 때 무념무상의 개념처럼 편안한 생각을 가지게 되며, 이성보다는 감성이 작동하게 되고, 작품을 모두 봤든 못 봤든 간에 찾아가는 전 과정 자체를 예술제로 즐길 수 있게 된다.

다랭이논(Ilya & Emilia Kabakov). 다랭이논으로 불리는 The Rice Field 또한 텍스트의 차경 기법과 자연의 배경을 작품의 일부로 하고 있다.
예술작품 사이를 오가는 농촌 공간 환경 경험의 과정이 그 가치를 발하게 되며, 일상적 체험을 예술적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이런 특징은 최근의 저명한 일본 미학자인 유리코 사이토(Yuriko Saito)가 제시한 ‘일상의 미학’ 개념에서 그 근거와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일상의 미학’은 ‘활동, 쾌 감각, 불확정성’의 개념을 통해서 그 가치를 얘기한다. 예를 들어 다도와 같은 의도적이고 형식적인 미의 추구에 있어, 그 차를 준비하기 위해 잎을 따고 그것을 말리고 달이는 여러 가지 일상의 행위 등도 그 형식적이고 고상한 미적 관습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즉, 예술의 형식을 지니지 않았다 해서 미학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동격의 섬세한 지각 활동으로 보는 것이며, 이런 일상의 활동들을 완성되어야 하는 미적 형식을 위한 부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서 ‘미적인 가치’를 지닌 일상의 미학으로 보는 것이다. 일본의 ‘일상의 미학’ 개념 등이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의 일상적 공간과 내용들의 가치를 승격시키는 밑바탕의 사고가 아닌가 싶다.
‘사토야마’의 경관적 알고리즘, 그리고 일상 미학의 경험적 가치가 대지예술제를 떠받치는 커다란 틀이며, 이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과정의 예술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농촌이 예술과 디자인을 만나니,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시감적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에 적용된 예술, 일상과 공간의 예술적 경험이다.
예술의 기술(Art of Art): 예술의 다가치적 요소 확보

관계(Tatsuo Kawaguchi). 실제 자생하는 식물이 작품과 함께 어우러져, 식물이 자라면서 매년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기존 식생의 훼손이 아닌 자연과 공생하는 유기적 작품의 방향을 보여 준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는 예술과 디자인의 가치를 다양하게 확보하고 있는데, 그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기존의 환경을 전혀 훼손시키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예술작품을 기존 맥락에 부합하는 개념으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간의 유형적인 측면뿐 아니라 무형적으로 지니고 있는 콘텐츠적 측면도 유지하였다는 점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유지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간 환경과 예술작품을 통한 보존적 가치 구현을 통해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내용들이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예술제를 통하여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하여 최대의 가치를 이끌고, 평범한 반응을 감성적으로, 미적으로 승화시킨다.

원더풀 빨간 소년(Tetsuo Sekine). 마쓰다이(まつだい)로 가는 길거리에 설치된 Tetsuo Sekine의 Boys with Red Lion Cloths Returned

원더풀 빨간 소년(Tetsuo Sekine). 이 작품은 마쓰다이역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갑작스레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공간의 무작위적인 순차적 경험이다. 편재된 예술작품들의 의도치 않은 발견과 기대 심리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드라마틱한 감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공간의 순차적 경험이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를 방문하다 보면 갑작스런 가이드의 멘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갑자기 길가에 있는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갑작스런 시퀀스의 연출은 일본의 경관디자인 특징과 연관시켜 볼 수 있는데, 일본 정원디자인 전략 중에 미에가쿠레(見え隠れ)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경험의 시간적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원에 쓰이는 또 하나의 디자인 전략이다. 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보였다 안 보였다 함, 나타났다 숨었다 함, 어른거림” 정도의 뜻인데, 일본 정원을 살펴보면 방문객에게 전체를 보여 주지 않고 힌트만을 주는 의도적 차단, 부분적으로 풍치를 가리는 장치, 또는 밀식 조성된 차 오두막(tea hut)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에 전체를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방문객을 유도하고 계속 나아가도록 하며, 그러다가 대체로 갑작스럽게 꽉 찬 신(Scene)이 나타나게 되는데 꽤 드라마틱하다. 보는 이의 순차적 경험을 위해 시퀀스 개념으로 만들어진 공간 디자인의 개념이 참 효과적이고 아주 디테일하게 감성적인데, 대지예술제의 공간 구성에는 이러한 개념이 들어가 있어 방문객이 급작스런 미에가쿠레(見え隠れ)에 의한 연출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가 숨어 있다.

포템킨(Architectural Office Casagrande & Rintala). 코르텐강을 이용해 나무의 색조와 주변 형태에 순응하며 대지의 형상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POTEMKIN

포템킨(Architectural Office Casagrande & Rintala). 지역의 폐기장이었던 곳을 참여 과정을 통해 예술작품 공간과 쉼터 공간으로 재생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예술작품의 공간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를 연결, 재생시키는 매개체로 쓰인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수요를 담아내는 예술작품, 지역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예술작품, 이런 것들이 구현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이 특정 장소에서 재생을 위해 행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의 잠재적 측면을 보여 주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티에서도 작동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예술작품이 한 공간에 설치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갈등의 시기이기도 하고 때로는 협동의 시간이 될 때도 있다. 이 또한 지역의 장소를 만들고 살리는 데 좋은 기회이다.

허수아비 프로젝트(Oscar Oiwa). 실제 지역민의 이름과 캐릭터를 기본으로 디자인되어 작품과 지역민의 삶이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다.
지역 재생과 커뮤니티의 활성화에는 집객 요소와 구성원 간의 소통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앞서 논한 것처럼 예술작품의 결과만 관조하는 예술제가 아니고, 예술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의 스토리와 역사, 관련한 사람의 이야기 등을 접하면서 그 접점의 플랫폼이 그 장소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에서 예술작품은 사람과 공간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로 작동하고 있고, 이는 지역 재생의 핵심이 되었다. 도시와 지역, 아티스트와 사토야마, 젊은이와 고령자 간 교류와 협동이 낳은 예술작품이 마을, 논, 빈집, 폐교 등을 장소로 삼아 에치고 츠마리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다랭이논(Ilya & Emilia Kabakov). 자연인지 인공작품인지 구분하기 힘든, 자연이 바로 작품인 사례이다.
디자인과 예술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소통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는 예술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냈다. 이는 예술작품을 과거의 전통적 의미로만 바라보지 않고 지역적, 맥락적, 공간적 관점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얻은 결과이고, 또 2차원적이고 관조하는 예술이 아닌 참여하고 과정을 중시하는 입체적 측면에서 바라본 결과이다. 효율과 기능 중심의 사고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내적 디세뇨(Interno Disegno)의 창의적 가치가, 한 번에 보기 힘든, 지붕도 출입구도 없는 예술제를 만들어 냈다.
‘예술’은 사실 어렵다. 예술제를 찾아간다는 것은 보통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의 일로 보이기도 한다. 대지예술제를 통해 예술의 영역이 일상으로 내려왔으며, 이해해야 하는 예술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러한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 우리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아니, 불편함이 아닌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러한 불편은 충분히 인내할 수 있다. 그 불편이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느끼게 해 준다면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에치고 츠마리 대지예술제는 여러 불편함 때문에 예술품을 즐기러 가는 과정을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해 주고, 예술을 통해 농촌을 재생시킨 ‘에치고 츠마리 효과’를 느끼게 해 준 ‘불편한’ 예술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