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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ULA / PUBLIC DESIGN02 · 정책·제도·공공서비스
원고·기고 / 016

정책을 구현하는 공공디자인

기획110. [정책x공공디자인]

지자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세 가지 ― 조직 · 절차 · 증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좋은 사례가 아니다. 염리동 소금길도, 옐로우 카펫도, 폭염 그늘막도 이미 성공했다. 부족한 것은 그 성공을 다음 사업으로 넘기는 장치다. 제도화되지 않은 디자인은 언제나 일회성으로 끝난다.

사례는 쌓였는데, 왜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는가

지난 두 편에서 우리는 정책이 결정이 아니라 집행에서 실패한다는 것(집행 격차), 그리고 공공디자인이 그 격차를 메우는 다섯 가지 성질 ― 구현성·체감성·즉시성·효율성·공유성 ― 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미 증명된 이 수단을, 우리 지자체는 왜 여전히 사업 단위로만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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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공공디자인의 실적은 결코 빈약하지 않다. 2012년 서울 염리동 소금길은 어두운 골목에 조명·번호·색채와 주민 거점을 설계해 범죄 두려움을 낮춘 국내 대표 CPTED 사례가 되었고, 이후 서울시 '생활안심디자인' 정책으로 이어졌다. 2015년 도봉구 방학중 통학로에 적용한 학교폭력예방디자인은 언어폭력 가해 경험률 3.8%p 감소, 학교폭력 두려움 26.5% 감소, 학생·주민 만족도 약 30% 향상이라는 정량 성과를 남겼다. 임대아파트의 이정표와 둘레길, '100세 마당'을 조성한 인지건강디자인, 부스형 상담 공간 '마음정원'을 만든 스트레스해소디자인은 돌봄과 정신건강이라는 추상적 정책 목표를 생활공간의 경험으로 번역해 냈다. 2014년 시작된 국민디자인단은 국민·전문가·공무원이 기획 단계부터 함께 공공서비스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2016년 iF 디자인 어워드 서비스디자인 부문 금상을 받았다.

성과가 없어서 확산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성과를 다음 사업으로 옮겨 실을 그릇이 없었을 뿐이다. 담당 과장이 바뀌면 방식이 바뀌고, 용역이 끝나면 축적된 현장 지식도 함께 종료된다. 4년 주기 성과 압박 속에서 검증된 디자인은 다시 '새로운 사업'의 이름으로 처음부터 시작된다.

이번 편은 그래서 사례집이 아니라 사용설명서에 가깝다. 민선 9기가 시작된 지금, 지자체가 추가 입법 없이 조례와 지침 수준에서 당장 착수할 수 있는 세 가지 ― 조직, 절차, 증거 ― 를 정리한다.

① 조직 ― 결정하는 자리에 디자인을 앉힌다

가장 먼저 손댈 것은 사람의 배치다. 공공디자인이 사업 부서의 하위 항목으로만 존재하는 한, 디자인은 이미 결정된 형식을 다듬는 마감 작업 이상이 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결정 단계에 참여하는 '총괄 직위'와,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상설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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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직위 ― 부서 위에서 조정하는 한 사람

영국은 지방정부에 디자인 챔피언(Design Champion)을 두어 개별 사업이 아니라 자치구 전체의 설계 품질을 조정하는 방식을 오래전부터 운영해 왔다. 런던 캠든(Camden) 자치구는 이 방식을 통해 도시 설계의 기준을 부서 단위가 아닌 자치구 단위에서 관리해 온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우리에게 이 자리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이미 다수 지자체가 총괄건축가·공공건축가 제도를 운영하며 건축·경관 분야에서 부서 위의 조정자를 두고 있다. 공공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의 창설이 아니라, 이 검증된 형식을 공공디자인 영역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명칭은 총괄디자이너든 디자인정책관이든 상관없다. 핵심 요건은 세 가지다.

  • 사업 부서가 아니라 기획·예산 라인에 배치될 것 ― 자문이 아니라 조정 권한이 필요하다.

  • 사업 확정 이전 단계의 검토 권한을 가질 것 ― 준공 직전에 부르면 색을 고르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 임기를 선거 주기와 어긋나게 설계할 것 ― 4년마다 초기화되는 조정자는 조정자가 아니다.

상설 정책랩 ― 축적이 일어나는 최소 단위

직위 하나로는 지식이 쌓이지 않는다. 핀란드 시트라(Sitra)의 헬싱키 디자인랩은 기후와 교육 문제를 개별 사업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재설계의 관점에서 다루며 '전략적 디자인' 개념을 정착시켰고, 영국 정책랩(UK Policy Lab)은 공무원·디자이너·시민이 설계 초기부터 함께 앉아 임대주택 거주자와 환자의 실제 애로를 정책에 즉시 반영했다. 세계 최초의 정부 정책랩이었던 덴마크 마인드랩 역시 같은 계보에 있다. 일본은 2021년 디지털청 안에 서비스디자인 유닛을 두어 부처 간 단절을 메우고 대국민 디지털 서비스의 설계 기준을 일관되게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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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공통점은 화려한 조직이 아니라 상주(常駐)다. 서비스디자이너와 데이터 담당자, 행정 공무원이 같은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적을 만든다.

지자체 규모에서 이는 대규모 조직 신설을 뜻하지 않는다. 국내에도 이미 참고할 형태가 있다. 강남구가 2019년 공공디자인 진흥계획을 통해 운영해 온 '공공디자인 실험실'은 담배꽁초로 지저분한 거리, 노상 흡연, 고령자 밀집 공동주택의 안전 같은 정책 과제에 파일럿 디자인을 투입해 효과를 검증하고 확산하는 방식을 상시 기제로 운용하고 있다. 전담 인력 2~3인, 연간 실험 예산, 그리고 결과를 정례 보고하는 회의체. 시작 단위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② 절차 ― 짓기 전에 시험하는 것을 규칙으로 만든다

조직이 생겨도 절차가 없으면 개인의 열의에 의존하게 된다. 두 번째 과제는 '사전 디자인 실증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은 본 집행에 앞서 반드시 프로토타입을 설치하고 시민 반응을 수집한 뒤 그 결과를 설계에 반영하도록 절차에 못 박는 것이다.

이 제안의 근거는 공공 조직의 속성 그 자체에 있다. 관료 조직은 통제와 예측 가능성 위에 설계되어 있어 실패를 감당할 여력이 극히 적다. 민간처럼 "빠르게 실패하고 배운다"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실험을 개인의 용기에 맡기지 말고, 실패해도 문책받지 않는 구간을 절차 안에 미리 만들어 주는 것이다. 프로토타입은 디자이너의 작업 습관이 아니라,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는 조직에게 실험할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다.

운영 방식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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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상 ― 총사업비 일정 규모 이상, 또는 불특정 다수가 상시 이용하는 시설·매체 사업.

  • 시기 ― 실시설계 확정 이전. 확정 이후의 실증은 요식행위가 된다.

  • 기간 ― 2주에서 3개월. 가설치·임시 시설물은 상당수가 정식 인허가 절차 없이 시험 가능하다는 점이 공공디자인의 실질적 강점이다.

  • 판정 ― 통과·보완·설계 변경의 세 가지 결론 중 하나를 반드시 문서로 남긴다.

  • 면책 ― 실증 단계에서 확인된 실패는 감사 지적 대상이 아님을 지침에 명시한다. 이 조항이 없으면 제도 전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왜 공공디자인이어야 실증이 가능한가

사전 실증이 모든 정책 수단에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조례를 시범 시행하거나 예산을 임시로 집행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벤치 하나, 사인 하나, 바닥 조명 하나는 오늘 설치하고 다음 달에 걷어낼 수 있다. 폭염 대응이라는 목표는 추상적이지만 건널목의 그늘막은 즉시 설치하고 즉시 체감된다. 횡단보도 앞 장수의자, 어린이 보호구역의 옐로우 카펫, 스마트 횡단보도의 바닥 신호는 모두 작게 시작해 효과가 확인된 뒤 전국으로 번진 형식이다.

즉, 사전 실증제는 공공디자인에만 부과되는 추가 규제가 아니라, 공공디자인만이 감당할 수 있는 고유 기능을 정책 절차 안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민선 9기 공약 목록에 이미 올라 있는 무장애 보행 네트워크, 다국어 안내체계, 통합 공공시설물 정비, 야간경관 사업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예산과 명분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남은 것은 짓기 전에 한 번 세워보는 절차뿐이다.

③ 증거 ― 체감을 숫자로 옮기는 지표를 갖춘다

조직과 절차가 마련되어도 증거가 없으면 확산되지 않는다. 공공디자인이 예산 심의에서 늘 후순위로 밀리는 이유는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효과를 말하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만족도 설문 한 장으로는 다음 해 예산을 지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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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 방식은 분명하다. 영국은 2010년 행동통찰팀(BIT)을 설립하고 What Works Network를 가동해 증거기반 정책(EBPM)을 제도화했다. 납세 고지 문구를 바꾸는 정도의 작은 개입에도 무작위 통제 실험으로 효과를 계량화했고, 검증된 것만 골라 공무원용 툴킷으로 배포했다. 핵심은 실험 자체가 아니라 '검증된 것만 확산한다'는 원칙과, 그 결과를 다음 담당자가 그대로 쓸 수 있는 툴킷 형태로 남긴다는 점이다.

공공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이를 공간의 언어로 번역한 지표 체계다. 학교폭력예방디자인이 남긴 3.8%p, 26.5%, 30%라는 숫자가 좋은 출발점이다. 이 사업이 예외적으로 강력했던 것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잘 측정되었을 뿐이다.

공간매개형 성과지표의 네 갈래

  • 행태 지표 ― 통행량, 체류 시간, 이용률, 야간 통행 비율, 무단횡단 건수. 관찰과 계수로 측정 가능하며 설문보다 신뢰도가 높다.

  • 인식 지표 ― 안전 체감도, 두려움 정도, 소속감, 정서적 안정. 사전·사후 동일 문항으로 비교한다.

  • 사건 지표 ― 사고·범죄·민원 발생 건수. 경찰·소방·민원 데이터와 연계하면 별도 조사 없이 확보된다.

  • 비용 지표 ― 대체 수단 대비 절감액, 유지관리비, 재시공 회피 비용. 예산 부서를 설득하는 것은 결국 이 항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을 더한다. 첫째, 지표는 사업 시작 전에 확정한다. 끝나고 나서 고르는 지표는 성과 홍보이지 증거가 아니다. 둘째, 실패한 실증의 기록도 남긴다. 무엇이 작동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축적이야말로 다음 담당자에게 가장 값진 자산이며, 이것이 없으면 지자체는 영원히 같은 실수를 반복 구매하게 된다.

제도화되지 않은 디자인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조직·절차·증거라는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전담조직·예산·조례라는 제도적 기반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디자인도 그 사업 하나로 끝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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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2012년 범죄예방디자인을 시작한 뒤 2018년 1월 전국 최초로 '사회문제해결디자인 조례'를 제정하고 2020년 기본계획을 수립해 이를 상시 정책사업으로 전환했다. 2015년부터는 시민·학생·디자이너·기업이 함께 사회문제를 다루는 '디자인 거버넌스' 플랫폼을 운영해 왔다. 주목할 것은 성공한 사업의 목록이 아니라, 성공을 반복 가능하게 만든 조례와 계획과 조직이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제도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디자인이 일회성 기법이 아니라 상시적 정책 수단으로 승인받았다는 증명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미 법적 근거가 있다.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은 지자체가 공공디자인 진흥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으며, 공공디자인은 결과물의 형태만이 아니라 기획·분석·운영·관리의 과정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는 새로운 권한을 요구하는 제안이 아니다. 이미 부여된 권한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방법에 가깝다.

민선 9기, 조례에 담을 최소 요건

  • 총괄 직위 ― 공공디자인 총괄 책임자의 설치 근거와 사업 확정 전 검토 권한.

  • 상설 조직 ― 실험·실증을 담당하는 전담 조직과 최소 인력의 명시.

  • 실증 절차 ― 일정 규모 이상 사업의 사전 실증 의무와 실증 단계 면책 조항.

  • 지표와 기록 ― 성과지표의 사전 확정 의무, 성공·실패 결과의 공개와 이관 의무.

  • 예산 ― 실증 전용 예산의 별도 계상. 사업비에서 떼어 쓰는 실증은 반드시 가장 먼저 삭감된다.

정책은 결정되는 순간이 아니라 시민의 거리와 창구에서 완성된다. 시민은 조례를 읽고 정책을 체감하지 않는다. 횡단보도 앞의 의자, 골목의 조명, 안내판의 글자 크기에서 체감한다. 공공디자인이 그 마지막 100미터를 책임지는 실행 전략이라면, 그 전략을 매번 새로 발명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이 제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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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하나, 절차 하나, 지표 하나. 민선 9기의 임기 안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갖춰지는 순간, 다음 편에서 살펴볼 개별 구현 사례들은 더 이상 흩어진 성공담이 아니라 어느 지자체나 꺼내 쓸 수 있는 목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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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 전체 목차

아홉 개의 주제,
하나로 이어지는 질문.

01공공디자인의 생각1202정책을 실현하는 방법1803일상을 바꾸는 실험1104안전과 회복의 조건1105모두를 위한 디자인806지속가능한 공공의 삶1007도시를 다시 읽다1108바다와 수변의 미래1209배우고 기록하고 확장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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