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안전과 회복의 조건
1 / 7쪽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인터뷰·기획기사 / 051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

[CUD Interview] "안전은 단순한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

홍익대학교 공공디자인전공 이현성 교수에게 듣는 산업안전디자인의 미래와 전략

"우리는 흔히 안전 디자인이라고 하면 위험한 곳에 빨간색 페인트를 덧칠하는 것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안전 디자인은 색채 이전에 '맥락'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근로자가 0.1초 만에 위험을 감지하게 만드는 시각적 기술, 그리고 그들이 일터에서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정서적 배려. 이것이 바로 진정한 CUD(Color Universal Design)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산업안전디자인의 방향입니다.“

공공디자인 전문가 이현성 교수(홍익대 공공디자인전공)의 시선은 늘 우리 사회의 가장 척박하고 위험한 곳을 향해 있다. 그는 20년 넘게 공공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며 4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온 베테랑이자, 디자인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가'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1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이 교수는 지난해 열린 2025년 산업안전디자인 세미나에서 '산업안전디자인 동향 및 시사점'이라는 주제로 기조발표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산업 현장의 안전 문제를 단순히 시설물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람'과 '심리', 그리고 '시스템'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또 다양한 산업안전디자인 활동을 통해 CUD(Color Universal Design, 컬러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라인 정립에도 힘쓰고 있다. 차가운 쇳소리가 가득한 공장에 '안전'이라는 따뜻한 입체성을 불어넣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CUD, 단순한 배려가 아닌 '인지 공학적 솔루션'

이현성 교수는 먼저 CUD에 대한 정의를 바로잡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CUD를 단순히 적록색약이나 색각이상자를 위해 색을 바꾸는 시혜적인 복지 차원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CUD는 생존을 위한 가장 빠른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정보를 인지하는 속도를 비교해 보면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빠르고, 이미지보다 색채가 월등히 빠릅니다. 위급한 순간, '위험'이라는 글자를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빨간색'을 감지하는 건 본능적이죠. 0.1초의 판단이 생사를 가르는 산업 현장에서 CUD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고령 근로자,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색각이상자까지, 그 누가 보더라도 정보를 직관적으로, 그리고 동일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2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이 교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본질인 '범용성'을 설명하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욕탕 수도꼭지를 예로 들었다. 굳이 '뜨거운 물', '찬 물'이라는 텍스트 없이도 빨간 점과 파란 점만으로 누구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 녹색 잔상이 가장 길게 남는 '푸르키네' 현상을 이용한 비상구 유도등처럼, 색채는 철저한 과학적 원리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공장들이 이러한 과학적 접근 없이 온통 빨간색과 노란색 경고문으로 도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과도한 시각적 자극은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치게 만드는 '시각적 소음(Visual Noise)'을 유발할 뿐이라며, 진짜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공간의 '비움'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이 교수가 제시한 핵심 전략은 '배경색의 통제(Background Control)'다. 안전색인 빨강과 노랑을 돋보이게 하려면 주변 환경의 색을 차분하게 눌러줘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바르셀로나나 싱가포르의 표지판이 유독 잘 보이는 이유를 건물 외벽과 거리의 배경색을 무채색으로 정돈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노란색 간판과 알록달록한 상점들이 즐비해 정작 안전 펜스가 묻혀버리는 우리나라 스쿨존이나, 화려한 설비와 바닥 색이 뒤섞인 공장은 경고 표시를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꼬집었다. 결국 진정한 CUD는 위험 요소를 부각하기 위해 나머지 공간을 '무채색'으로 정리하는 통합적인 공간 설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공장 내 '트래픽 플래닝(Traffic Planning)'과 행동 유도 전략

시선을 공장 바닥으로 옮기자, 이 교수는 공장 내부를 '신호등 없는 도시'에 비유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공장은 거대한 트레일러와 지게차, 사람이 뒤섞여 움직이는 일종의 '미니 도시'와 같다. 하지만 도심보다 훨씬 위험한 중장비가 다니는 이곳에 정작 체계적인 '교통 계획(Traffic Planning)'은 전무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3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도시에는 차도와 인도, 신호등체계가 명확하지만 공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모호하고, 교차로에 신호등 하나 없는 곳이 태반이죠. 단순히 바닥에 선 하나 긋는 것으로는 사고를 막을 수 없습니다. 공장 내부에도 도시계획처럼 명확한 도로망 계획을 수립하고, 교차로에는 레이저 신호등을 설치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는 해외 사례와 연구를 바탕으로 강요 대신 행동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행동 유도(Nudge) 디자인'을 제안했다. 덴마크에서 쓰레기통까지 녹색 점선을 그려두자 사람들이 이를 따라가 쓰레기를 버린 사례처럼,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장 바닥에 단순히 선만 긋는 대신 '발자국 모양'을 그리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멈춰 섭니다. 또 차량 속도를 줄이는 데는 '예측 불가능성'이 효과적이죠. 횡단보도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홀로그램 동물은 운전자가 놀라 브레이크를 밟게 만들어 사고를 예방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을 디자인하는 넛지 효과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인이 시각보다 청각 정보에 민감하다는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청각적 넛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고속도로 터널의 사이렌 소리가 졸음운전과 사고를 예방하는 것처럼 공장 내 위험구간에서도 시각적 경고와 함께 청각적 자극을 입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인간의 실수 제어를 위한 심리적 접근, 정서적 안전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현성 교수의 안전 철학은 물리적 환경을 넘어 근로자의 심리까지 닿아 있다. 그는 산업재해의 88%가 기계 결함이 아닌 사람의 실수에서 기인한다는 ‘산업안전 연구자,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의 통계를 인용하며 '산업 복지'로서의 디자인을 역설했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4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왜 실수를 할까요? 몰라서가 아닙니다. 피곤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노동부 자료를 봐도 12,000건의 산업재해 원인이 PSR(Psychosocial Risks), 즉 심리 사회적 위험입니다. 기계 정비에는 수억 원을 쓰면서 정작 그 기계를 돌리는 사람의 마음에는 얼마나 투자하고 있나요? 근로자가 작업장으로 돌아가기 전 단 10분이라도 뇌를 식히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사고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예방책입니다."

그는 실제 진행했던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 사례를 들려주었다. 보통 공장의 흡연 구역은 구석진 곳에 방치되어 있지만 그는 그곳을 새소리가 들리고 숲처럼 꾸며진 '힐링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잠깐이라도 어두운 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자연을 느끼며 쉬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실제로 휴식의 질이 높아지자 소위 말하는 '아차 사고(Near Miss)'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일만 강요하는 공장보다 '나를 배려해주는 공간'이 있는 공장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은 이미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이 되었다. 그가 '정서적 안전 디자인(Emotional Safety Design)'을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그는 안전 교육 방식의 변화도 주문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상사가 일방적으로 안전 수칙을 읽어내려가는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날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시나리오를 그림 카드(Green Card)로 직관적으로 보여주거나, 안전 활동 참여 시 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기법 도입을 제안했다. 안전이 딱딱한 '의무'가 아닌 흥미로운 '재미'로 다가갈 때 비로소 현장의 안전 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안전 디자인의 표준화와 미래: '안전 디자인 키트'와 디지털 전환

대화가 깊어지면서 주제는 현장의 현실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이 교수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안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대기업과는 달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영세 중소기업들에게 고비용의 디자인 컨설팅은 '그림의 떡'일 뿐인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5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교수는 '안전 디자인 키트' 보급을 제안했다. 현장에서는 비용 부족과 낮은 품질 문제로 인해 수작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해결하려면 표준화된 키트를 저렴하게 보급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세 사업장에 무작정 페인트 비용을 지원하기보다 검증된 안전 디자인 키트를 제공하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구상하는 '키트'는 일종의 조립식 안전 패키지다. 공장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기둥, 문, 바닥, 위험 기계 등에 부착할 수 있는 표준화된 스티커와 가이드라인을 대량 생산하여 저렴하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마치 온라인 쇼핑몰에서 부품을 고르듯, '표준형 A타입', '보급형 B타입' 식으로 나누어 사장님들이 예산에 맞춰 필요한 파츠를 골라 붙이기만 하면 되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면 2천만 원 들던 비용을 10~20만 원대로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런 표준화된 키트를 개발해 무상으로 보급한다면 대한민국의 산업 안전 수준은 획기적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디자인 복지'이자 공공 디자인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미래 기술과의 접목도 강조했다. 최근 AI CCTV가 사람의 움직임 패턴을 감지해 자동으로 신고를 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만큼 공장 안전 디자인에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닥의 안전선이 단순한 페인트가 아닌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구현되어 상황에 따라 색깔이 바뀌고, 위험 감지 시 즉각 알람을 주는 반응형 시스템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미래 청사진이다.

이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디자인은 결국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과거의 디자인이 제품을 잘 팔리게 하는 포장 기술이었다면, 미래의 디자인은 고령화, 다문화, 산업재해 같은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핵심 전략이라는 것이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6
ARMULA / PUBLIC DESIGN04 · 안전·회복력

안전 디자인을 비용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투자로, 나아가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안전은 칠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철학이 표준 모델 정립과 정책적 지원을 통해 산업 현장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 차가운 쇳소리가 가득한 공장에 따뜻한 '디자인의 숨결'을 불어넣을 그의 행보가, 대한민국을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로 변화시키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안전은 도색이 아니라 CUD 시스템 설계로 완성된다587
CONTENTS / 전체 목차

아홉 개의 주제,
하나로 이어지는 질문.

01공공디자인의 생각1202정책을 실현하는 방법1803일상을 바꾸는 실험1104안전과 회복의 조건1105모두를 위한 디자인806지속가능한 공공의 삶1007도시를 다시 읽다1108바다와 수변의 미래1209배우고 기록하고 확장하다10
103개 글 전체 보기 ↗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